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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월드컵 결승의 승부차기에서 바조가 시도한 슛이 하늘로 치솟았고, 대회 톱스타는 순식간에 가장 불행한 준우승으로 전락했다. 브라질에게 트로피를 준 이탈리아인들은 이성을 잃고 바조상을 조각하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축구 영웅 지단은 백조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1994년 월드컵 이후 그를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하지 않은 나라는 단 한 나라뿐이다. 그 나라는 이탈리아다.

1990년 월드컵에서 22세의 나이에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바조는 이후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다시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명문 유벤투스로 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휩쓸며 마라도나의 뒤를 이을 최고의 후보가 됐다. 그러나 1994년 월드컵 개막 직전 오른발을 다치는 불운을 겪었다. 이로 인해 그는 아일랜드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노르웨이와의 두 번째 경기에 도달했을 때, 그는 후반 22분에 교체되는 수모를 당했다. 골키퍼 팔리우카가 발진 파울로 퇴장 명령을 받았을 때 사키는 바조를 벤치로 불러들여 다른 골키퍼인 마르케지안을 투입하는 강타가 있었다. 사키의 그런 놀랍고 대담한 결정으로 이탈리아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일찌감치 찾아온 빈약한 숫자들을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성과였지만 바위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탈리아 언론은 벤치에 왔을 때 사키를 향해 미친 결정이라고 외쳤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사키와 바조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다.


멕시코와의 결승전까지 바조의 부진이 계속되자 언론은 공개적으로 사키를 편들었다. 바조 대신 졸라를 선발로 내세우자는 요청도 조별리그 무대의 이런 불황을 겪었고, 16강 진출자 중 16위를 차지하려는 이탈리아의 실망스러운 행보는 1994년 월드컵의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였다.

결국 순수한 인재라는 비판을 모두 불식시켜야 했다. 나이지리아와의 16강전을 코앞에 두고 사람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팀의 실적은 기대 이상이었다. 0-1로 패해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린 후반 44분 바조는 천금의 추가 페널티킥 결승골까지 줄을 지어 완승을 신고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바조는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5분을 남겨놓고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렸다. 1인승의 바조쇼는 준결승에서 정점을 찍었다. 불가리아 수비를 상대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두 번 득점을 올리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대회에서만 5골을 터뜨린 바조의 정신나간 활약은 이미 1986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에 비유됐다. 그때까지 1994년 월드컵에서 빛난 최고의 스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보였다. 그러나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바조를 기다리는 미래는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생애 최악의 실수, 2위 선수의 눈물이었다. 브라질의 거친 수비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지 못한 바조는 승부차기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했고, 월드컵 톱스타에서 2위로 추락했다.


이 실수로 인해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사실 바조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브라질이 마지막 다섯 번째 발차기를 한다면 이탈리아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바조는 이탈리아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그때까지 그의 영웅적인 활약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월드컵 최우수선수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개인 부문 로마리오에게 빼앗겼다. 한때 마라도나의 뒤를 이을 수 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선수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그는 단판 경기 성적과 실책으로 문턱에서 좌절했다.

1994년 월드컵 이후 소속팀 유벤투스로 복귀한 그는 잦은 부상과 슬럼프에 시달려 순조로운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여기에 젊은 델 피에로의 눈부신 등반은 벤치 신세로 전락하는 수모를 불러왔다. 94/95시즌이 끝난 후 바조는 쫓겨나듯 유벤투스를 떠나 라이벌 AC 밀란으로 둥지를 옮겼다. 하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이적 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키가 1994년 월드컵을 물려받은 이후 줄곧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선수 생활 내내 카펠로, 사키, 리피 등 유명 감독과 불편한 관계였던 바조는 무엇보다도 사키와의 불화로 매우 유명했다. 사키도 1994년 월드컵에서 계속 바조에게 기회를 준 것은 나의 실수라며 강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1997년 바조는 다음 월드컵을 1년 앞둔 볼로냐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때까지 세 살 바조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너무 재능있고 열정적이어서 죽을 수 없었다. 97/98시즌에 무려 22골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대표팀 복귀를 선언하고 마침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1998년 월드컵에 간신히 출전해 보기 드문 기회까지 얻었다. 델 피에로의 부상으로 인한 적시 하락은 비리에가 선발 투톱을 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이것은 그가 바보라는 위치에서 결코 낭비할 수 없는 기회였다. 오스트리아와의 첫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한 것은 물론, 조 전체에서 성숙한 플레이를 펼친 바조는 언론과 팬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부상으로 고생하던 델 피에로가 돌아왔을 때, 16강을 앞두고 체자레 말디니 감독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델 피에로의 선발 복귀는 벤치 행에 다름 아니었다. 말디니는 이 문제에 연연하지 않았고, 바조 대신 델 피에로를 선택했다. 그러나 델 피에로가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부진했던 반면, 교체 선수 바조는 날카로운 발리슛으로 바르테즈 골키퍼를 위협하며 훨씬 더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였다. 이탈리아가 승부차기에서 프랑스에 패하자 언론은 바조 편을 들어 몰디니에게 책임을 돌렸다.



1998년 월드컵이 끝난 뒤 바조는 인터로 이적해 호날두와 함께 골든 듀오를 결성해 잠시 팬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호날두가 부상으로 쓰러진 후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게 되었고, 바조 자신도 잦은 부상으로 고생했다. 게다가 리피와의 불화 때문에 브레시아로 옮겨야 했다. 바조는 브레시아 유니폼을 입고 4시즌 동안 45골을 터뜨리는 동시에 통산 300호 골을 돌파한 금탑까지 쌓으면서 팬들로부터 축구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이것은 1930년대와 40년대의 실비오 피올라와 주세페 메자 이후 50여 년 만의 이정표였으며, 바조의 투박한 프로정신이 만들어낸 피와 땀의 결과였다. 300골을 돌파한 37세의 현역 은퇴자는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20년 넘게 축구를 사랑해 왔다.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축구를 더 잘하기 위해 도핑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한 유일한 도핑은 끊임없는 노력이었다.오늘날 그의 뛰어난 기술뿐만 아니라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변함없는 정신, 그리고 강한 프로정신은 젊은 선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현역 시절 바조의 가장 유명한 별명은 판타지 스타와 말총머리였다. 이 중 전자는 영어로 환상을 뜻하는 바조라는 별명과 ~를 말하는 사람을 뜻하는 이탈리아 접미사가 만든 신학으로 이탈리아 언론에 알려져 있다. 사전은 무에서 기름을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게임을 하는 선수라는 뜻이다. 판타지 스타라는 수식어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의 다른 선수로는 1930년대의 주세페 메자, 1940년대의 발렌티노 마 졸라, 1960년대의 지아니 리베라가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1990년대까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때 메자, 리베라는 과거 선수들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판타지 스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연극은 너무나 독창적이고 예술적이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공을 다루는 동안 드리블의 방향이나 스피드 컨트롤이 매우 좋았고, 정확성을 중시하는 섬세한 슈팅과 프리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창조적인 패싱과 절묘한 첫 터치도 바위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한편, 그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있어서 브라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 중 한 명이었고, 지쿠는 바조는 현장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다라고 쾌활하게 응수했다.

바조는 1994년 월드컵 결승에서 페널티킥을 잃은 것 외에도 페널티킥과 깊은 유대감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바조는 통산 122번의 페널티킥을 시도했고, 이 중 106번의 페널티킥을 관리했다. 이것은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양측에 가장 큰 기록이다. 1990년대, 1994년, 1998년 월드컵까지 3회 연속 페널티킥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로 선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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