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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비틀즈의 열풍으로 한껏 달아오른 대중음악계는 롤링 스톤즈, 야드버드, 크림,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프랭크 자파르 등 실력파 뮤지션들이 대거 출연했다. 기존 음악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등 실험을 즐겼던 뮤지션들이 새로운 팝 장르를 열었다.

장르의 마찰을 보여준 블루스 재즈 리듬과 블루스 계보에 의한 블랙 음악, 스윙 컨트리 록앤롤 계보에 의한 화이트 음악도 록 음악 분야에서 신비롭게 60년대에 일어났다. 흑인 뮤지션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를 이빨로 찢고 손으로 문질러 백인들의 주요 영역인 록을 만들었다. 또한 영국의 백인 밴드인 에릭 클랩튼, 진저 베이커, 잭 브루스는 머디 워터스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을 표본으로 삼아 강렬한 블루스 록을 연주했다. 한편 블랙뮤직 고유의 컬러와 스타 시스템을 결합한 음반 레이블인 모타운은 리듬 앤 블루스, 디스코 펑키 등 재치 있는 사운드와 함께 기량을 선보였다.

존 F 대통령의 암살.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유주의 세력이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고 제안했다. 역설적으로, 대중음악과 문화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이 고조되었을 때 더 풍부한 과일을 생산했다. 당시 대중음악은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과 저항을 발산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성세대와 대립각을 세운 젊은 세대는 60년대 대중음악의 핵심 소비자로, 자유와 사랑, 평화 등 근본적인 가치를 갈망하는 히피문화로 드러났다. 문, 제퍼슨 비행기, 제니스 조플린과 같은 사이키델릭 록 그룹은 음악적 환각과 환각을 통해 정신적 피난처를 제공했고, 후에 같은 밴드는 급진적인 공연으로 억압된 자유의 분출물을 맛보았다. 1967년 6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몬테레이 국제 팝 페스티벌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히피 세력을 결집시켜 세계 최초의 대규모 록 페스티벌이다.


1969년이다. 한 세대를 끝장내려는 듯 팝뉴스의 한쪽에서 비틀즈의 해체설이 불붙었다. 레드 제플린은 데뷔 앨범 레드 제플린으로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오갔고 핑크 플로이드는 우마금마를 통해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는 1969년을 자전적 성장 소설 69에서 묘사했다. 비틀즈는 화이트 앨범, 옐로우 서브마린, 애비 로드 등을 발표했고 롤링 스톤즈는 혼키 톤크 위민즈를, 털 많은 히피들은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파리의 드골은 권좌에서 물러났고,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969년은 그 해였다. 그래도 미국은 정치사회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베트남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쟁과 사랑, 평화를 외쳤던 히피들은 현실과 안일한 삶을 추구했는데, 이는 기성세대가 이상주의만을 쫓는 소극적인 저항으로 비쳤다. 기진맥진한 히피들은 한 곳에 문화를 전파할 새로운 기회, 즉 구심점이 필요했다. 베델 평원에서 다시 한 번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히피 문화가 융합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약 3일 반 동안 뉴욕 북부 베델 평원에서 대규모 축제인 우드스톡 음악과 미술전이 열린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음악뿐 아니라 액션 아트, 서커스, 마술 등 다양한 예술 행사도 포함했다. 우드스톡 4로 불리는 존 로버츠, 조엘 로젠만, 마이클 랭, 아티 콘펠드는 자유와 사랑, 평화를 축하하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한 곳에 모여 문화와 예술을 모두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이 행사를 기획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슬로건이 평화와 음악의 3일이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4대 우드스탁은 300에이커 규모의 월킬을 축제의 장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우드스톡에서 70km가량 떨어진 베델플레인스에서 열렸다. 4대 우드스톡은 부지 선정부터 예술인 선정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판매에 들어갔다. 존 로버츠와 조엘 로즈먼은 이 축제의 광고와 홍보를 담당했고 아티 콘펠드, 마이클 랭은 공연 관리와 예술인 관람 등 축제 전반의 업무를 담당했다. 3일간 우드스톡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티켓은 18달러, 24달러였다. 18달러짜리 티켓은 뉴욕 시내의 레코드 가게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우편함을 통해 팔렸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행사 전 신문과 라디오 광고가 당시의 획기적인 홍보 전략이었다. 이로 인해 약 18만 6천 장의 티켓이 미리 팔리면서 엄청난 판매 실적을 올렸다. 그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축제 열기를 몰아냈다. 축제의 날인 8월 15일, 남자, 여자, 게이, 노숙자, 히피 등 축제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드스톡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폭우로 평지가 진흙탕이 되었고, 우드스톡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히피들의 돌출 행동이 현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많은 히피들이 지구 환경을 해치고 현장 교통이 마비돼 공연장 주변 20마일 지역에 교통혼잡을 빚었다며 논에 차를 밀어넣고 빈 차를 점거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히피 유입으로 공연장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을 감지한 주최 측은 우드스톡 축제를 무료 공연으로 선포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첫 무대는 민속 음악가 리치 헤븐에 의해 열렸다. 당시 무명이었지만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며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프리덤이 흑인 영적인 노래를 즉석에서 리디렉션한 것은 팝 공연 역사상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첫날은 분명히 조안 배즈였다. 짧은 머리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른 조안 배즈는 사랑과 평화를 부르며 혼란의 현장에 담담함을 전했다. 둘째 날, 신예 산타나가 광란의 기타를 치면서 현장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60년대 사이키델릭 록의 리더였던 제니스 조플린과 제퍼슨 항공은 문과 함께 광란의 무대를 펼치면서 사람들을 몽환적인 세계로 몰아넣었다. 영국 밴드 로저 돌트리가 폭발적인 에너지로 마이 제너레이션을 부르자, 관중들은 그와 단결했다. 



1969년 8월 17일,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마지막 무대는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장식되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는 마치 홀린 듯 기타를 연주했다. 지미 헨드릭스가 이를 이용해 기타를 뜯거나 큰 소리를 낼 때 베델 평야가 막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 공연의 절정은 그가 스타 스팽글 배너를 연기했을 때였다. 효과기로 굉음을 내며 조롱하듯 불안정한 그의 기타 연주는 당시 관객들에게 미국의 폭력을 고발하고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행위로 보였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지미 헨드릭스를 향해 손을 들어 열광했다.

언급된 음악가들 외에도,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컨트리 조와 피쉬, 크로스비 스틸의 내시 앤 영, 십 어워드 애프터, 라비 샹카 등 많은 예술가들이 우드스톡 무대에 올랐다. 3일 동안 약 50만 명의 관중이 베델 평원에서 함께 노래하고 울었다. 여러모로 우드스톡 축제는 60년대 화려한 록 문화의 정점을 장식한 행사였다. 팝 뮤지션들과 자유분방함과 시대정신의 관객들은 함께 호흡하며 공연문화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금도 그는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자 대규모 야외축제의 대명사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억제되지 않는 쾌락과 면죄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의 추구와 현실적 대안의 부재로 히피 등 청소년 문화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우드스톡 축제를 60년대 히피 문화의 시기로 본다. 그들의 자유 추구, 평화와 편안함의 가치는 궤도에서의 방향과 편차를 상실하게 했다. 미국 역사상 혼란과 혼란의 60년대는 저항의 기운이 바위 속에 태어난 시기지만 히피 중심의 플라워 운동은 1969년 이후 자생력 없이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히피들에게 정신적 쾌락을 제공했던 사이키델릭 록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의미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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