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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브라질 사람들이 펠레를 황제라고 부른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 남자를 신으로 숭배한다. 사실, 지구상에는 그를 숭배하는 종교도 있다. 월드컵 내내 혼자 독차지했던 남자, 불과 몇 분 만에 월드컵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눈부신 골을 터뜨린 남자, 왼발로 세계를 정복한 그라운드 위의 마술사, 하지만 끊임없이 아픔을 입었던 남자는 디에고 마라도나다.

마라도나의 프로 경력은 1976년 15세의 아르젠티노 주니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성인 국가대표로 데뷔해 일찌감치 재능을 입증했지만 아르헨티나가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은 마라도나가 월드컵 같은 대회의 압박을 견디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1979년은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U-20 월드컵 6연승으로 우승하면서 영웅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해이기도 했다. 소비에트와의 결승전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등 이번 대회에서 6골을 터뜨린 마라도나는 당시를 그라운드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으로 떠올린다. 이번 승리는 지금까지 U-20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최강국으로 만드는 초석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젠티노스 주니어의 등판에서 4년을 보낸 마라도나는 명문 보카 주니어의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1981년 2월 22일 데뷔 후 2골을 넣은 마라도나는 그 시즌 보카에서 첫 클럽 축구 우승을 차지하며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유럽 클럽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결국 1982년 6월 4일 새로운 세계 이적료 기록으로 카탈로니아의 거인 바르셀로나로의 여행을 확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 스페인 땅에서 마라도나를 기다리는 첫 번째 이벤트는 다름아닌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이었다.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까. 전 세계가 주목해 온 젊은 천재의 첫 월드컵은 시련과 좌절이 두드러진다. 마라도나는 벨기에의 첫 경기 전부터 상대팀으로부터 강도 높은 견제와 거친 반칙에 시달렸다. 아르헨티나 팬들과 카탈로니아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 경기의 주인공은 마라도나가 아닌 벨기에의 에르빈 반덴버그였다. 마라도나는 헝가리를 상대로 활발한 2차전에서 두 골을 넣었지만 천재성을 발휘한 것은 여기까지다. 이탈리아와의 2차 조별리그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크를 충분히 하지 못했고, 팀의 운명이 걸린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경기 막판 노골적인 악의적인 파울을 범해 퇴장당하기도 한다. 덜 성숙한 마라도나 마리오 켐페즈와 오스시 아르딜레스의 활약이 4년 전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르헨티나는 지쿠, 소크라테스, 팔카웅이 이끄는 교묘한 브라질과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꿈은 물거품이 됐고 마라도나에 대한 세계평가는 여전히 불완전했다.


월드컵 참패에 이어 시작된 바르셀로나 선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첫 시즌에 간염으로 고생했고 후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1983년 9월 23일 애슬레틱 빌바오와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빌바오의 정육점으로 불리는 안도니 코이코에체아의 백 태클에서 왼쪽 발목 골절상을 입었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선수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부상에서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또 다른 문제는 그의 대중적인 명성이었다. 마라도나는 완벽한 볼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럽에서의 생활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는 부와 명성, 능력이 없었다. 실제로 마라도나가 코카인을 만지기 시작한 곳은 스페인이었고, 언론과 팬들은 그를 문제아라고 부르며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라도나의 바르셀로나는 모든 경기에서 38골이라는 기록으로 두 시즌 만에 막을 내렸다. 바르셀로나 선수 마라도나가 남긴 마지막 장면은 1984년 5월 빌바오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무릎 꿇기와 발차기.

1984년 6월 30일 마라도나는 다시 이탈리아 클럽 나폴리로 이적하여 세계 이적료 신기록을 수립한다. 나폴리는 이전 시즌에 단 한 번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고, 이전 시즌에는 11위에 머물렀던 클럽이었기 때문에, 이 이적은 세계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나폴리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고 마라도나의 위대한 황금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마라도나의 첫 시즌에서 나폴리는 8위로 올라섰고, 그 다음 시즌에는 3위로 올라섰다. 물론 이것은 위대한 역사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아마도 월드컵은 긴 월드컵 역사에서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대회였을 것이다. 마라도나의 존재만으로도 가능했다. 펠레와 가린샤, 보비 찰턴과 유제비오,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우어 등 영웅과 거인을 탄생시킨 것은 월드컵이었지만 사실상 월드컵 전체와 맞먹는 경쟁은 없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1986년 월드컵 그 자체였다.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가 미셸 플라티니, 지쿠, 엔조 프란체스콜리, 마이클 라우드럽, 칼 하인즈 루멘기개 등과의 경주에서 부동의 승자가 되었고, 그것은 당대의 의문의 통일과 같았다.

마라도나는 1986년 7번의 월드컵 경기에서 5골을 넣었는데, 이 중 적어도 3골은 축구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기억될 장면이다. 그라운드에서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악명 높은 신의 손의 골을 넣어 잉글랜드를 화나게 했지만, 몇 분 후에 터진 마라도나의 발에 격노한 영국 팬들조차 아연실색했다. 아르헨티나 쪽에서 출발한 마라도나의 정신은 잉글랜드의 피터 비어슬리, 피터 리드, 테리 부처, 테리 펜위크, 피터 실턴, 게리 스티븐스를 차례로 꺾고 월드컵 사상 최고의 골을 만들어냈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경기는 역사적인 승리였으며, 실제로 한 축구선수가 경기에서 발휘할 수 있는 극단적인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마라도나의 마술은 벨기에와의 준결승에서도 계속되었는데, 특히 벨기에 수비수 4명을 꽁꽁 얼린 두 번째 골은 잉글랜드전 장거리 드리블에 버금가는 명작이었다.



마라도나의 영광은 1986년 월드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5월 10일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마침내 클럽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제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나폴리에서도 신으로 떠오를 것이다. 나폴리와 계약을 연장한 마라도나는 1989년 팀을 UEFA컵 정상에 올랐고, 이듬해 다시 한 번 세리에A 왕좌를 차지해 유럽 챔피언 AC 밀란을 제쳤다. 당시 세리에A가 수많은 슈퍼스타들을 거느린 최고의 리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라도나와 나폴리는 이들의 업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절묘한 패스와 신데렐라의 수전 세르히오 코이코에체아의 승부차기 스탠드에 의존할 정도로 전체적인 힘을 잃었다. 그래도 결승에 오른 것은 마라도나의 존재 덕분이었다. 1994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페르난도 레돈도, 아리엘 오르테가가 아르헨티나에 새롭게 추가되면서 마라도나의 존재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금지약물을 사용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제명 이후 기둥을 잃은 아르헨티나도 16강전에서 무너졌다.


1994년 월드컵 마약 사건 이전부터 마라도나는 이미 각종 추문과 트러블에 휘말렸다. 특히 1991년 도핑 검사로 적발돼 15개월 동안 처벌을 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의 위대한 왼발 세계 축구 외에도, 마라도나의 이름은 코카인, 술, 총기 사고, 탈세, 폭행, 과체중과 같은 부정적인 이유들로 오랫동안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한 무절제한 생활방식의 결과로 마라도나는 2000년대에 매우 자주 입원해야 했고, 2000년과 2004년에 심장마비로 생명을 위협하는 병을 앓았고, 2005년에는 과체중 문제로 위장 축소 수술을 받았다. 물론, 나는 약물 중독과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2008년 10월 29일은 마라도나가 하늘과 지옥의 양 극단을 넘나들며 살아온 뒤 소원 중 하나를 이룬 날이다. 선수 시절 그는 언젠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감독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해왔고, 그 꿈은 정말 실현되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역사가 그랬듯이 그의 코치 경력도 우여곡절이었다.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는 2010년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볼리비아에 1-6, 브라질에 1-3으로 패하는 등 마지막 2경기를 남겨두고 5위에 그쳤다. 결국 페루와 우루과이로 가는 본선 직행 티켓을 간신히 따냈지만 예선 기간 내내 마라도나는 일관되지 않은 선수 선발과 전술 부재에 대한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마라도나 감독이 독학한 실력자 리오넬 메시로 2010년 월드컵에서 새로운 전설을 쓸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가 남아공에서도 실망을 되풀이한다면 아마 마라도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국민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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