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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들의 자존심은 유별나게 강하다. 물론 1960년대 평범한 공격수 마리노 페라니가 펠레보다 뛰어난 선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A와 B의 실력이 대등한다면 언제든 격투기 논쟁을 벌일 준비가 돼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이탈리아인들이 1930년대 영웅 듀오보다 사모라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오늘날 스페인은 브라질, 잉글랜드와 함께 축구의 나라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20세기 초의 축구 발전 속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20세기 초 아마추어 수준에서 강세를 보인 유럽 국가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으며, 스페인이 중위권으로 밀려나는 등 네덜란드 스웨덴 이탈리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 스페인의 축구 열기는 전국을 강타했다. 이 대회에서 스페인은 라이벌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꺾고 은메달을 따냈고, 사모라와 피치 레이팅스 등 스타급 선수들을 배출해 스페인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듬해 올림픽 챔피언 벨기에를 홈으로 불러 2-0으로 승리하며 자국 축구 열기에 불을 붙였다. 이 축구 열기는 1929년 스페인 내셔널리그가 공식 출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한 그해 스페인은 잉글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역사적인 4-3 승리를 거두었는데, 잉글랜드 이외의 국가가 영국을 상대로 기록한 최초의 공식 승리였다. 1920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사모라는 이번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갈비뼈가 부러졌음에도 끝까지 경기를 펼치며 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사모라는 1920년대 스페인의 축구 발전과 인기에 가장 큰 공헌자 중 한 명이었다. 스페인 축구계는 여전히 당시 톱스타였던 사모라와 피치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두 선수의 이름이 트로피인 사모라상과 피치 치즈의 이름으로 승화된다.

1920년대 스페인을 대표하는 스타 골키퍼 사모라는 1934년 이탈리아 대회를 통해 월드컵에 데뷔했다. 당시 스페인은 한때 시대를 주름잡았던 오스트리아와 번더팀으로 불렸던 이탈리아에 비해 그리 호평을 받지 못했고, 객관적 성과 면에서도 열세였다. 실제로 스페인이 이탈리아의 8강 상대국으로 확정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최국 이탈리아가 이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모라는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인극을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경기에서 3개의 슛을 모두 성공시킨 사모라는 이탈리아 언론으로부터 8개의 손을 가진 거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페인은 사모라가 이탈리아의 맹공을 1점차로 막아내면서 8강 120분전을 1-1 무승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 승부차기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120분 동안 출전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두 팀은 재시합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모라는 부상으로 다시 뛸 수 없었고 스페인은 결국 이탈리아에 0-1로 무릎을 꿇었다. 스페인은 8강전 2경기에서 엄청난 편파 판정 논란 때문에 패배를 거의 확신하지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 페라리가 1차전에서 만든 동점골은 명백한 위반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사모라의 부상도 골을 넣은 페라리와 충돌하는 동안 지속됐고, 결국 경기 내내 부상이 악화돼 다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스위스 심판이 귀국 후 자국 축구협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도 심판 결정에 대한 논란은 재경기에서 계속됐다. 스페인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월드컵 도전을 포기해야 했지만 사모라의 골키퍼 실적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사모라는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는 한편, 메자 다음으로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탈리아 언론은 심지어 사모라를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치켜세우며 듀오를 능가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엄청난 자존감을 감안할 때, 이것은 사모라에게 주어진 가장 높은 극찬이다.

사모라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최고의 골키퍼이자 모든 인기의 스타였지만 결코 다른 사람들의 모델이 아니었다. 코냑 술꾼이자 엄청난 흡연자였던 사모라는 자제력이 소홀했고, 소속팀인 사모라를 영입한 감독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사모라는 1920년 올림픽 때 주먹으로 상대방을 때렸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기도 했고, 세금 탈루와 아바나 담배 밀수 혐의로 경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이런 사모라의 자유분방한 성질은 이탈리아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 메자와 자주 비교되었다. 메아자는 사모라처럼 술과 늦잠으로 유명했고, 여자들의 움직임은 더욱 심했다.



게다가 사모라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계속된 스페인의 내전 기간 동안 카탈로니아인 사모라는 극우파들에게 억류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강인한 마음씨였던 사모라는 교도관들에게 자신의 경력에서 겪었던 춤에 대해 말해 주어서 기뻐했고, 축구의 열렬한 팬이었던 교도소장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타고난 애착을 바탕으로 출소한 사모라는 프랑스로 건너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한동안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1958년 스페인 일간지 마르카는 리카르도 사모라의 공적을 기리며 사모라상을 제정했고, 시즌마다 리그에서 가장 작은 골키퍼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모라상은 한 시즌에 28경기 이상 뛴 각 팀의 골키퍼에게 주어지며, 경기당 패배율을 계산해 우승자로 선정된다. 마르카는 사모라상 외에도 매 시즌 득점왕에게 피치라는 트로피를 수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상은 또한 20세기 초를 즐겼던 빌바오의 대표적인 공격수 라파엘 모레노 피치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154cm의 작은 키에도 빠른 스피드와 놀라운 득점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피치 레이팅스는 29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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