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역사는 제2의 요소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1940~50년대 브라질의 간판스타 지인은 1950년 월드컵을 빛낸 최고의 스타였지만 브라질의 불행한 준우승으로 수많은 2위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지뉴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주장하곤 한다. 만약 브라질이 1950년 월드컵 우승을 했다면 축구황제의 칭호는 펠레가 아닌 지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오늘날 브라질은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축구 강국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펠레, 디디, 가린샤가 팀을 이끌면서 브라질이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에서 연속 패배한 이후였다. 적어도 1930년대와 40년대까지만 해도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의 높은 벽에 막혀 남아메리카에서 2위 자리를 지켰다. 레오니다스, 지네우, 아데미르는 브라질이 1위에 오르는 것을 가능하게 한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1940년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누렸던 지뉴는 레오니다스의 뒤를 잇는 브라질 최고의 선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브라질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언제나 아르헨티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월드컵이 열리지 못했던 1940년대에는 코파아메리카게임으로 분리돼 있던 남미 대륙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브라질은 남미 최고의 자리를 놓고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경쟁했다. 하지만 항상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것은 아르헨티나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이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 성벽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지 프레스를 비롯한 브라질 선수들의 성장세는 물론 194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총파업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아르헨티나 구단이 선수들에게 주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면서 디 스테파노, 페데라 등 당대 스타들은 모두 해외로 유출됐다. 이런 선수 유출 문제는 아르헨티나가 당분간 국제무대에 손을 내밀지 못하게 했다. 이 기회에 브라질은 1949년 코파 아메리카를 정복함으로써 남아메리카의 새로운 왕자로 떠올랐다. 이번 우승은 무려 27년 만에 브라질이 감격적인 승리를 거둔 것으로, 지이누는 아데미르, 자이레와 함께 대회 우승을 이끌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불참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는 빠졌지만 남미 라이벌 우루과이, 전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 유럽 최강국인 스페인, 스웨덴이 대거 출전한 1950년 월드컵은 브라질의 진정한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년도 코파 아메리카 우승으로 사기가 오른 브라질 자체가 월드컵 첫 승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가장 강한 팀은 브라질이었다. 특히 스페인, 스웨덴, 우루과이와 우승을 다투는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브라질의 실재가치가 도약하기 시작했다. 지닌호의 환상적인 마법에서 스웨덴은 1-7, 스페인은 1-6, 아데미르는 지닌호의 패스를 이어받아 그 두 경기에서만 6골을 터뜨리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 공연을 지켜보던 이탈리아 기자들은 그가 양발로 그림을 그린 필드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선수라고 칭찬했다. 전 세계 언론들도 지뉴와 아데미르를 칭찬하며 브라질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21만 명의 관중이 몰린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큰 격변 중의 하나였으며 브라질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이었다.

1950년 월드컵은 결승에 토너먼트 방식을 도입하지 않고 2차 풀리그 형식으로 진행된 유일한 종목으로 명명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대회에서는 준결승과 결승전이 없었고, 대신 결승에 오른 4개 팀은 1950년 월드컵에서 우승팀을 가리는 풀리그 3경기를 치르게 됐다. 스웨덴과 스페인을 상대로 2연승을 거둔 브라질은 마지막 1경기를 남겨놓고 1승 1무를 남겼고 결승전에서도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최소 무승부로 우승할 수 있었던 브라질은 패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주장 바렐라의 지휘 아래 공격적인 대응 작전을 준비해온 우루과이는 경기 초반 브라질을 혼란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지뉴는 브라질의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1950년 월드컵 MVP에 선정되는 개인적인 영광을 누렸다. 아데미르는 진드뉴와 함께 유럽 팀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득점왕에 올랐다. 월드컵 이후 문제가 됐던 동료 선수들과 달리 지뉴와 아데미르에 대한 브라질 팬들의 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뉴는 1950년 월드컵은 나를 해친 대회일 뿐이라고 했다.지닌호는 1950년 월드컵 이후에도 최고 성적에 머물렀지만 195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모레이라가 32세의 지지보다 젊은 디디를 선호하면서 과감한 세대교체를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여유 있는 성격의 지뉴는 모레이라와 충돌하기보다는 스스로 한 발짝 물러섰고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지 않았다.



1957년 시즌에 지유는 36세에 24골을 넣으며 상파울루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으며 말 그대로 황혼기를 불태웠다. 그때까지 브라질 선수 생활을 계속했던 지소연은 1958년 월드컵을 통해 마지막 기회를 얻는 듯했다. 그러나 펠레는 37세의 지지를 주장하기보다는 17세의 소년 펠레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고 싶었다. 펠레는 지뉴를 대신해 1958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펠레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떠오르며 축구 역사를 바꾼 것을 감안하면 2위 지뉴의 이미지는 더욱 한심하다.

이처럼 지뉴는 1950년 대회 준우승 이후 월드컵과 더 이상 인연을 맺지 못했고, 이날까지 지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펠레, 가린샤, 지쿠, 호마리우, 호나우두 등 후배들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지뉴는 브라질 사람들에게 2번이나 조연이 아닌 브라질 축구의 아버지로 보여진다. 지뉴는 축구 황제 펠레의 소년으로서도 우상이었다. 펠레는 어렸을 때 지동원의 플레이에 감탄하며 자랐고,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영웅의 모습이 절망에 빠지는 장면까지 목격했다. 1950년 월드컵의 비극적인 결승전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 펠레는 이후 월드컵 우승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펠레는 실제로 8년 후에 그것을 했다.


펠레는 그동안 본 선수 중 가장 완벽한 선수였다며 지뉴를 높이 평가한다. 펠레의 주장에 따르면 지유는 득점이나 어시스트 모두 공격과 미드필드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정확한 슈팅과 양발 패스를 겸비한 무결점 선수였다. 실제로 지뉴는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을 확립하는 데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편 지뉴는 또 다른 월드컵 우승자인 저슨의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지뉴는 지슨의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는데, 지뉴가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지도해 준 덕분에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우리 선생님도 지네였다. 엄밀히 따지면 누구보다 완벽한 선수였고, 지닌호에게 수비수들의 표적을 따돌리고 자유자재로 상대해 공을 패스하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진슨의 지도 덕분에 지슨은 디디에 이어 브라질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성장했다. 골든 레프트 풋이라는 별명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저슨은 1970년 월드컵에서 펠레에 이어 두 번째로 값진 선수로 유명하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약한 브라질 스타 몇 명이 가장 좋아하는 어린 시절의 아이돌로 꼽혔다.

지유 지인은 오늘날에도 브라질 축구의 발달에 큰 공을 세우고 있으며, IFFHS에 의해 20세기 브라질의 4번째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참고로 펠레가 1위, 가린샤가 2위, 지쿠가 3위였다.

댓글